남경태, <철학>, 들녘.

(알라딘 TTB 기능이 뭔가 개편된 듯 하군 -ㅅ- 자세히 살펴보기 귀찮음.)
알라딘에서 화려하게 떠들길래 혹해서 구입한 책이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철학과가 아닌 사회학과 출신의 저자 약력도 왠지 마음에 안 들었다. 게다가 처음 몇 장을 넘기면서 나의 불안이 왠지 현실화되는 것 같아서 짜증이 올라왔다. 그리스철학에서 빼먹은 내용이 왜 이리 많아! 투덜투덜거리면서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후회가 전혀 없다. 정말 훌륭한 책이다. 서양철학사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줬달까. 하나의 예를 들자면 보통 버클리-흄과 함께 묶이는 로크가 이 책에서는 데카르트-홉스와 함께 묶인다. 그렇게 묶은 원인은 직접 이 책을 보고 찾아보시길.

이 책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단연 현대철학과 포스트현대철학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처음으로 봤던 철학사 책들은 헤겔 이후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 머리가 나쁜 거겠지. 마르크스, 키에르케고어, 니체, 프래그머티즘, 구조주의, 분석철학, 포스트모더니즘, ... 뭔가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과 사상들이 등장하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더라. 결국 읽는 둥 마는 둥 페이지를 넘기기에만 바빴고, 그런 얄팍한 겉핥기 지식에 뭔가 불편했지만 '원래 현대철학은 근대철학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든 거니까 이해가 안 돼야 하나보다'라는 내멋대로의 생각을 갖고 지냈다.

그러다 이 책을 잡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철학사 속의 '스토리'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니만큼 현대철학에서도 단편적인 지식들보다 하나의 지식이 이전의 혹은 동시대의 철학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강조해서 쓰고 있었고, 덕분에 현대철학을 보는 관점이 하나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 '스토리'를 이해하니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머리에 쟁여둔 지식들이 이리저리 엮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이런 느낌을 동일하게 받았는지, 방금 가본 알라딘 리뷰 코너에도 칭찬 일색인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뭐 그럴만한 책이다. 가독성도 좋고,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도 훌륭하고, 새로운 관점을 많이 배울 수 있는 것도 좋고. 하지만 그러니만큼 약간의 비판도 있어줘야 밸런스가 맞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 이제부터 신나게 까겠음.

저자가 철학자 출신이 아닌게 마음에 걸렸는데, 역시 그런 부분에서 '딱' 걸리는 게 있었다. 이 사람은 철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몰라도 '철학'적으로 사고하지는 못하는 듯 하다. 그래서 스스로 모순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저자는 책 pp. 150-151에서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남겼다.

스콜라 철학이 교회가 지배하는 중세의 지적 세계에 균열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신학에 종속된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을 뿐 스콜라 철학 자체가 진보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베이컨, 데카르트, 로크 등 근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스콜라 철학을 폄하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후대의 관점에서 전대의 것을 비판할 때는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볼 때 흔히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중략)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지적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해당 시대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학문의 내용만을 문제 삼으면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할 뿐더러 그 비판도 결국 후대에 똑같은 방식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2500년의 서양 철학사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토양인 분석철학적 관점에서 과거의 철학을 비평한 것은 그의 명성을 무색케 하며, 왜 그 저작이 서양 철학사의 고전으로 꼽히는지 의아하게 만든다. (후략)


그럼, 저자는 과연 과거의 철학 이론들을 '과거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을까?

아니, 절대로 아니다. 저자가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재단하고 마구 깎아내린 걸 본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_- 몇 개만 뽑아볼까?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소개하며 '시대를 무려 2500년이나 뛰어넘은 선견지명'이라는 과대평가(p. 40)를 내렸고, 데카르트의 송과선 이론을 '엉뚱한 이론', '터무니없는 견해', '황당한 이론' 등으로 마구 깎아내렸으며(p. 240),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철학을 '단순무식한 귀납적 논리'라고 폄하했고(p. 326), 경제학자들의 한계효용 개념을 '얄팍한 개념'으로 단정지었다(p. 389). 내가 대충 읽어나가면서 눈에 걸린 것들만도 이만큼인데 전공자들이 제대로 책을 살피면서 찾을 수 있는 과찬/폄하는 얼마나 많을까.

비판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송과선 이론이 틀렸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한다든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철학을 조리있게 반박하고, 한계효용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는 가운데 저런 말을 했다면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해당 시대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학문의 내용만을 문제 삼으면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할 뿐더러 그 비판도 결국 후대에 똑같은 방식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라고 해놓고는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마구 난도질하면 어쩌자는 말?

저자가 자신이 신나게 떠들어놓은 철학을 하나도 체화(體化)하지 못했다는 것은, 에필로그의 첫 문장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2500여 년에 걸친 방대한 서양 철학사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이 세계에 관한 올바른 앎을 얻는 과정"이라고 요약된다." (p. 545) 저기요 -_- 그 직전까지 모든 권위와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설명했으면서 갑자기 '올바른 앎'이라뇨? 갑자기 2500년을 거슬러 플라톤의 이데아 세상으로 돌아가신 건가요? 저걸 '다양한 설명 방법' 정도로만 말했어도 내가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았을텐데. 하긴, 철학책을 저술한 '사회학자'한테 철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건 너무 무리인가.

여기에 덧붙여 오개념이 생길 수 있는 부분도 몇 군데 있어서 더욱 주의가 요구된다. 197쪽에서 저자는 아인슈타인이 E = mC2[sic]이라는 간결한 공식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고 말한다. 정말? -_- 아인슈타인이 뜬 건 '공식' 때문이 아닌데. 이런 발언은 과학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221쪽에서는 미술에 대한 편협한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과학이 관찰을 주무기로 삼는다면 재현 예술을 대표하는 미술에서는 사실성이 핵심이다. 미술이라면 무엇보다 대상을 올바로 묘사하는 데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미술가 여러분, 미학자 여러분, 이 사람의 이 말이 옳은가요? 저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걸요. 미술의 핵심은 예술성에 있지 사실성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요. 474쪽에서는 언어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 등장한다. "의성어에 기원을 둔 이름 (...) 은 기표와 기의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미안하지만 아닐걸요. 박학다식한 아저씨, <일반언어학강의>라도 한 번 읽어보고 쓰시지 그러셨어요. (참고: 소쉬르 저, 최승언 역, <일반언어학강의>, 민음사, 2006, pp. 96-97)

저자는 무척 박학다식하고 유식하다. 곳곳에서 서양사와 동양사, 한국사를 끌어다 이야기하고 정치-사회-경제-종교 등 다양한 주제를 연결시키는 재주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지식이 지나친 자신감을 끌어낸 거 아닐까? 풍부한 서술은 좋지만, 최소한 전문가들의 이야기는 들어보고 쓰지. 책 중간중간 고개를 내미는 편협한 예제들과 묘사들이 이 책의 '사족'이다. 정말 안타깝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21 후반 :P)

이 책에 대한 내 최종 결론은, 철학을 좀 배워서 자신만의 기준이 생겼고 가려들을 귀가 생긴 사람이 '새로운 관점'을 얻기 위해 슬쩍 보면 좋을만한 책이라는 거. 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책의 사고 전개가 너무 편협하다는 생각이 든다. 뭐, 늘 그렇듯이 이것도 그저 내 평가일 뿐. :D

@ 아놔 너무 길게 썼다
by 로보스 | 2007/09/12 20:49 | |감상| | 트랙백 | 핑백(3)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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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M. K. 뮤니츠, 현대분석철학, 서광사. 정동호,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책세상. 남경태, 철학, 들녘. [감상문] 볼프람 아일렌베르거, 철학의 시작, 들녘. [감상문] 기다 겐 편저, 현대사상지도, 산처럼. [감상문] 플라톤, 국가·정체(政體), 서광사. 고트프리트 마르틴 외, ' ... 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장 마리 .. at 2007/12/07 21:42

... 니라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저자 장 마리 장브는 언어학자고 역자는 독문학자다. 그러다보니 철학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혹은 남경태 씨처럼 아는 척 하기 위해 있는대로 늘어놓았다거나. 물론 가장 가능성 높은 추측은 그냥 글을 어렵게 쓰는 취향이 있다는 것이겠지만. :) 책 도입부에서 저자는 ... more

Linked at 世界はネオハピ! : 깊이와 넓이. at 2008/10/16 09:43

... 름을 줄줄이 주워섬길 수 있는 사람은 지식의 넓이가 넓은 사람은 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꼭 생각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선 &lt;철학&gt;을 쓴 남경태 씨가 그 대표적인 예인 듯 하다. 일일이 언급하는 것도 피곤하지만, 전공이니까 한 번 짚고 넘어가자면 과학 공부도 비슷한 것 같다. 과학 교양 ... more

Commented at 2009/04/22 15: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9/04/23 10:26
비밀글님// 뭐 그거 하나만 갖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니까요 :) 전반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너무 절대적으로 여기는 게 불만이었습니다 -ㅠ- 사람이란 언제든 틀릴 수 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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