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민음사.

드디어 등장. 이 책 독후감을 쓰려니까 손이 벌벌 떨려온다. 쓰기 전에 잠시 알라딘 서평들을 둘러보고 왔는데, 다들 어쩌면 이렇게들 글의 핵심을 잘 찝어내고 소화를 시키셨는지... 가끔 '보드리야르 제대로 이해한 분들'을 보면, 독후감 잘못 썼다간 그분들께 능지처참이라도 당할 것 같은 느낌이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그래, 나는 이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무지몽매한 자다. 시뮬라시옹은 영어의 시뮬레이션(simulation)에 해당하는 불어 단어. 하지만 그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시뮬레이션과는 사뭇 다르기에 굳이 불어 발음을 따라서 표기한다. (마치 소쉬르의 시니피앙/시니피에처럼) 시뮬라크르란 시뮬라시옹된 대상을 의미한다. 굳이 우리말로 갖다붙이면 '허깨비' 정도 되려나? 허깨비는 모사와는 또 달라서, 실제 존재하지 않는 대상까지도 나타낼 수 있다. 이 책에서 보드리야르가 계속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실재를 뛰어넘는 허깨비.

보드리야르는 신이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신'이라는 시뮬라크르를 도입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다. 디즈니랜드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뮬라크르로서 존재한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광고'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성찰이었다. 광고는 상품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광고가 다루는 대상은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소비자의 상품 선택에 있어 상품 그 자체의 품질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 경제학에서 광고에 대해 하는 설명(신호보내기 signaling)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흡수할 수 있는 수준은 이 정도에 그치는 듯 하다. 물론 내 철학적 소양이 얕은 탓도 있겠지만, 더욱 큰 원인은 이 책의 형편없는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이 한 문단에 하나 나오면 다행스러운 수준이다. 차라리 바벨피시 번역기가 이것보다 낫게 번역할 것 같다. 이 사람의 불어 실력이 문제일까? 뒤에 덧붙인 해제와 책 곳곳에 붙어있는 각주를 보면 '이 사람 자체가 글 쓰는 데 소질이 1 ng도 없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문장 호응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맞춤법과 표준어조차 곳곳에서 틀린다. 그런 주제에 또 각주는 왜 이리 많아. 첫번째 글꼭지에서는 각주 양이 본문 양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도대체 출판사 편집부에서는 뭘 보는 건지? 민음사에서 훌륭한 책들을 번역하는 건 좋지만, 제발 똑바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겼으면 좋겠다. 살다살다 이런 쓰레기 번역서는 <이슬람의 과학과 문명> 이후 처음인 것 같다. 토 나와.
by 로보스 | 2007/06/11 23:00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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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긁적 at 2007/06/12 09:25
.... 나.. 나노그람?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7/06/14 14:13
대세는 나노! ㅋㅋ
Commented by WizardKing at 2007/12/29 23:25
불어를 몰라서 영역본으로 한 챕터 정도를 훑어 봤는데 - 원문은 아닐지라도, 그 문장들을 보니 이 책을 잘 번역하기란 결코 쉽지 않겠더라고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7/12/31 13:53
WizardKing님// 오 고맙습니다. 그래도 이 책의 번역은 너무 심했어요 =_= 역자가 우리말에 대한 이해조차 제대로 안 갖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Commented by WizardKing at 2008/01/01 17:31
좀 직역투이긴 해서 저도 참 불만이었는데 -_- 보드리야르가 글을 워낙 어렵게 쓰나보더라구요.. 윽.. 사실 그의 문체 자체가 흔히 쓰는 문장 스타일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8/01/01 22:59
WizardKing님// 하긴- 촘스키도 글 어렵게 쓴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보드리야르도 좀 그런 과의 인물인가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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