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DNA 이중나선 구조(1953)가 밝혀지기도 전인 1940년대에 나온 책이지만, 분자생물학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담고 있어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 책이다. 나는 사실 잘 몰랐는데, 이 책은 사실 슈뢰딩거가 같은 제목의 대중 강연으로 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한다. 그 강연 50주년을 맞이하여 전세계 유명 과학자들이 떼로 모여 학술회의를 열었고, 거기서 발표된 내용들을 묶어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 들어있는 필자들의 이름을 보면서 나는 이 책의 포스를 짐작할 수 있었다. 도킨스와 더불어 진화론계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굴드, <총, 균, 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생물학자 다이아몬드, 호킹, 와인버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한 물리학자 펜로즈 등이 필진에 속해있다. 왠지 자꾸 비슷한 제목의 <상대성이론, 그 후 100년>과 비교를 하게 된다. 상대성이론조차 이해하지 못한 그 허접한 필진에 비교하면 이 책의 내용은 얼마나 알차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뛰어난 과학자들의 창의력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금 기억나는 것만 몇 개 읊어보겠다. 우선 '언어 사용 유전자' 덕분에 인류가 이렇게 뛰어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다이아몬드의 주장이 있다. 사실 그렇다. 침팬지와 인간은 유전자 수준에서 볼 때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인간과 침팬지의 지능 수준은 엄청나게 다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다이아몬드는 여러 예를 제시하면서 '언어 사용 유전자'가 존재하며 그것에 의해 인간 이성이 유도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소한 변명을 덧붙이면, 언어 사용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말은 정확히 언어 사용을 관장하는 유전자가 딱 존재한다는 게 아니라, 그저 언어 사용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이 실재한다는 말이다. 언어습득에 대한 행동주의 관점을 반박한다는 의의 정도?) 창발성(emergency)에 의해 생명이 탄생했다는 주장도 참신했다. 한 때 우리 학교 총장이었던 L모씨가 쓴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왠지 나는 전부 헛소리일 것 같아서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여러가지 과학적 예들을 들면서 보여준 창발성 이론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심지어 핵산이나 단백질이 없어도 생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한다! 열역학 제 2법칙의 새로운 해석도 눈에 띄었다. "평형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다시 돌아오려는 힘이 강력하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가? 르 샤틀리에의 원리를 그 한 예로 들고 있고, 이를 통해 생명 현상을 설명한다. 강력한 에너지원인 태양이 지구 환경을 평형에서 저만큼 멀리 끌고 갔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복잡한 질서계인 생명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이야 흥미로워.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지만, 물리학-화학-생물학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필요한 책이라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과학적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러가지 색다른 시각들을 많이 제공해주고 있으므로 한 번 도전해 볼 만도 하다. 알라딘 서평에도 보니 이 책을 읽고 감동받은 사람이 몇 있더만. 그건 그렇고, 이 책의 번역 역시 참으로 기가 막히다. 아놔. 이 책을 옮긴 이도 철학 전공이다. 문득 '철학 하는 사람들은 다 자기가 과학 책을 번역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철학 전공한 사람이 번역한 과학 책 중 제대로 된 건 한 번도 못 봤다. 제발 그 오만한 자부심 좀 내다버렸으면. 물론 철학한 사람 중에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옮긴이는 절대 그렇지 않다. 맨 끝에 붙어있는 '역자 후기'에 보면 역자는 심지어 <생명이란 무엇인가>조차 이해하지 못한채로 이 책을 번역했다고 한다. 그런 주제에 이 책을 보면서 다시 그 책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 책의 난이도가 슈뢰딩거 책의 n배(n>2)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그렇게 제대로 이해했는데 다음과 같은 번역들이 튀어나오나? 엄격한 다윈주의 세계관의 두 가지 특징은 생명의 역사의 지질학적 행렬을 곧바로 유전 물질의 생리화학적 본성으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유기체의 순간적 책략으로 환원하는 것을 장려한다. (41쪽) 그런 망의 역동적인 행동은 부호를 담고 있는 계가 보이는 극도로 다양한 행동들에 대해 선택을 할 수 있는 유전 가능성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파국적인 혼돈에 불과한 것일수도 있다. (110쪽) 도대체 뭔 소리야? 철학자는 이 따위로 번역해놔도 다 이해되나? 원본이 워낙 훌륭한 책이라 아무리 역자가 깎아내리려고 해도 많이 안 깎인게 다행이지. 짜증난다 짜증나. 과학 공부 안 한 사람한테는 과학책 번역을 맡길 수 없는 법이라도 제정됐으면 좋겠다. (이 책의 공역자로 생물학 전공한 사람이 한 명 들어가있는데, 솔직히 물리학-화학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책에서 철학자·생물학자 둘이서 뭘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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