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레 라카토스, <수학적 발견의 논리>, 아르케.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 원래 발음은 '라카토슈'에 가까운 듯.)는 포퍼와 쿤을 잇는 유명한 과학철학자로, 포퍼 이론과 쿤 이론의 장점을 취합한 '연구 프로그램(research programme)'의 개념을 제시해 주목받은 사람이다. 이 사람이 포퍼 이론('추측'과 '반증'의 반복으로 과학사를 설명하는 이론)을 수학사에 적용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제목만 봐도 벌써 포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우리말 제목이자 영문판 부제목은 <수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Mathematical Discovery)>. 포퍼의 주저 <과학적 발견의 논리>가 떠오른다. 영문판 주제목은 <증명과 반박(Proofs and Refutations)>. 역시 포퍼의 유명한 <추측과 반박>을 패러디한 것 같다.

라카토스에 대해서는 이미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 것을 읽었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리고 비록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 프로그램' 이론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수학 역시 포퍼 이론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이 책에서 제시한 수학적 발견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원초적인 추측.
2) 증명.
3) 전면적인(global) 반례.
4) 증명의 재검토 및 추측의 개선.
5) 새로운 추측을 기준으로 다른 정리들의 검토.
6) 원래의 추측에서 나온 결론들 검토.
7) 반례가 새로운 예로 변형되면서 새로운 탐구 분야 확립.


여기서 1-4번 단계는 매번 반복되면서 수학적 발견을 점차 풍성하게 만들고, 가끔 5-7번 단계가 진행될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이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드는데, 가장 주된 예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다. 아마 중고등학교 때 한 번쯤은 들어보는, V - E + F = 2라는 공식.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예외 혹은 괴물(이라고 번역되어있던데 도대체 원래 단어는 뭘까?)이 등장하면 어떻게 처리하는지 어느 '고급' 학급의 수학 토론 시간을 빌려와 보여주고 있다. 뒤에 첨부한 부록에서는 이것 외의 다른 예들도 몇 가지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견고히 한다.

상당히 놀랐다. '수학'이라는 것은 어찌됐든 연역적으로 유도되는 것이고 그 정리들이라는 건 옴싹달싹할 수 없게 고정된 것인 줄만 알았는데,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과학의 경험적 지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구나. 부록 2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어쩌고저쩌고라는 어떤 수학적 정의가 있을 때,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정의했는지 학생들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책의 뒷부분을 살펴보면 그 정의를 써서 정확하게 설명되는 정리가 등장할 것이다. 아마도 역사적으로는, 책의 순서와 반대로 발견되지 않았을까. 정리를 만드려고 했는데 그 '증명'이 부정확해서 기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정의를 도입하고, 그에 맞춰 정리를 '증명'하는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것이 수학의 논리성 혹은 연역성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다. 확실히, 수학적으로 공리계와 추론규칙이 결정되면 정리를 '증명'하는 방법은 이들을 이용하는 방법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철저한 수학적 논리성 혹은 연역성에 해당한다. (이것을 엄밀화하려고 했던 것이 힐베르트의 형식주의였고.)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수학자들이 증명을 하다가 원하는 정리가 나오지 않을 때 '증명'의 룰을 깬다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증명'의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는 것. 사실 수리논리학적으로 말하면 '정의(definition)'라는 것은 주절주절 길게 말하기 귀찮을 때 요약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고, 그 요약할 내용이 무엇인가는 정의된 대상의 이름과는 전혀 무관하다. 따라서 설령 이름이 같더라도 내용이 다른 정의가 존재할 수 있고, 이러한 것이 실제 수학 연구에서는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라카토스의 결론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라카토스의 천재성에 또 한 번 놀라고, 역시 유명한 사람의 책은 뭔가 '포스'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번역을 제대로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책이라도 허섭쓰레기가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음... 조금 심하게 말해서, 옮긴이의 번역 실력은 거의 바벨피쉬 번역기랑 비슷한 수준인 것 같다. 번역만 못하는 줄 알았는데 역자 후기를 보니 글 자체를 정말 재미없게 쓰는 분 같다. 번역 문제로 읽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라카토스 씨의 사상이 워낙 흥미를 끌어서 간신히 끝까지 다 볼 수가 있었다. 과장 40% 섞어서, 번역만 빼고 다 좋은 책이다. 흥.
by 로보스 | 2007/05/19 10:28 | |감상| | 트랙백 | 핑백(2)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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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포퍼의 제자라고는 하지만, 쿤의 영향도 강하게 받아서 나중에는 포퍼와 얼굴도 안 보는 사이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_-; 여튼 이 아저씨가 쓴 책 중에 &lt;증명과 반박&gt;이라는 책이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수학이 철저한 '증명'으로 이루어져있고, 그 어디도 손댈 수 없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라카토슈는 자신의 박사 논문 ... more

Commented by 시엔 at 2007/05/19 13:31
오, 저 빈칸에는 뭔가 채워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ㅎㅎ 뭐랄까 수학이라면 책을 베개속에 넣고 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저 뿐인가요?
Commented by 큐리아 at 2007/05/19 16:42
어떻게 그런 수학적 정의가 나오게 되었는지 학생들이 알 길이 없다는데 공감ㅠ
지겨운 미적 문제들 풀면서 수학자들이 어떻게 e의 정의를 생각하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하더라고요... 증명을 꼼꼼하게 한다는 선생님의 인강을 들었는데, e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가르쳐 준다면서 e가 정의되는 식을 먼저 제시하고, 이 식의 극한값은 수렴하는데 그걸 e라고 한다고 교과서와 똑같이 설명을 끝내시는-_-;;;
그래서 뒤에 배우는 ln x 의 도함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e의 정의가 여기에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한 것에 만족해야 했어요.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7/05/19 23:49
시엔님// 채웠습니다 ^^ 저는 태생이 이공계라 수학이 싫어도 봐야하는 입장이라지요 T_T

큐리아// 오랜만이구나 ㅎㅎ 네가 지적한 사항들은 수학사를 뒤져봐야 사실 알 수 있는 내용들이지 ^^ 경문사에서 발행한 <오일러가 사랑한 수 e>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e를 맨 처음 착상한 게 누군지는 모른다고, 그러나 아마도 복리 계산에서 나왔을 거라고 얘기하더라. (39쪽)
1년에 n번 연이율 r의 복리로 계산한다고 하면, 원금 P를 넣어놓고 t년이 지난 후의 원리합계를 S = P(1+r/n)^(nt)로 계산할 수 있는데, 이 때 P = 1, r = 1, t = 1인 상황에서 n이 커짐에 따라 S가 어떻게 변할까? 그냥 몇 번 끄적거리다보니 수렴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중 호기심 많은 한 사람이 수렴성을 증명했던 거 아닐까? :) 명시적으로 이 부분을 처음 지적한 건 야곱 베르누이(179쪽)라고 하는구나.
이 책에는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실려있는데, 미적분학의 발전과 더불어 수학자들이 "도함수가 그 자신과 비례하는" 함수를 찾고 싶어했고 그게 지수함수의 첫 등장이라고 하는구나. (152쪽) 내가 볼 땐 이게 그나마 가장 쓸만한 설명 아닐까 싶은데. 문제는 고등학교 과정, 심지어 대학교 기초 과정에서도 이걸 엄밀하게 증명할 수 없다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약속'처럼 정의를 내리는 게 아닐까 싶어. (헥헥 길다)
Commented by 미리내 at 2007/05/20 00:53
아아, 이런 책도 읽으시는군요! 재밌어 보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7/05/21 15:12
미리내님// 번역이 쒰구려요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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