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 <과학과 메타과학>, 지식산업사.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양자역학의 이론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수학적으로 양자역학을 어떻게 다뤄야할지는 이미 충분히 알려져 있다. 다만 직관적으로 그 수학적 풀이가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바로 이 점이 양자역학의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이 모여 공통적인 해석을 하나 탄생시켰으니, 그게 바로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이라는 녀석이다. 요 녀셕이 요새 업계 표준이다. 나도 이 해석을 통해 양자역학을 배웠고. 그런데 스튜어트 교수님의 수리물리 수업을 들으면서 에버렛 해석(Everett interpretation)이라는 새로운 녀석을 배우게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여하간 양자역학에 여러가지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에 흥미가 생긴 나는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 와중 서울 해석(Seoul interpretation)이라는 녀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해석 방법을 고안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지은이, 서울대학교 장회익 교수다.

지은이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이면서 동시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겸임교수를 맡고 있는 사람으로, 과학의 철학적 해석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 책을 쓴 것도 자신의 그러한 철학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을 터. 이 책에서 지은이는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룬다. 굳이 말한다면 첫번째 주제는 과학의 인식론이고, 두번째 주제는 과학을 통한 윤리학이라고나 할까.

결론부터 말하겠다. 지은이는 그냥 순진한 물리학자로 보인다. 물론 무언가 그냥 물리학자치고는 알고 있는 것도 많고 생각하는 범위도 넓지만, 그 생각이 순진한 물리학자의 생각을 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볼까? 지은이는 책 속에서 진화론자 굴드를 인용하는데, 굴드를 인용한 사람 치고는 진화론에 대한 이해가 너무 얕은 것 같다. 굴드 입장에서 인간은 '진화의 분포곡선' 한 끝자락에 불과한데도, 이 책에서 인간은 엄청 대단한 존재로 묘사된다. 지은이의 윤리관 역시 순진한 물리학자의 그것을 넘지 못한다. 뭐라뭐라 복잡하게 써놓았지만, 결국 지은이의 관점은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것. 그리고 현대과학이란 대단히 위대한 존재라는 것. 나는 이 주장들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책의 2부를 보면서 매우 복잡한 심경이었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지은이가 물리학자라서 그런지 분류하는 걸 무진장 좋아한다. 내가 볼 땐 말도 안 되는 분류인데, 그걸 엄밀한 척 하고 갖다 쓴다. 예를 들어 과학의 학문분야를 물리과학/생명과학/사회과학의 세 가지로 분류(53쪽)하는 건, 도대체 무슨 기준에서인지 의아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이 분류를 사용해서 설명을 진행한다. 또 동력학 이론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술공간, 서술모형, 서술양식이라고 주장하는데(94쪽), 과연 이들만 결정되면 동력학 이론이 완성될 수 있을까? 나는 이 주장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인데 말이지.

이 책은 지은이의 논문을 정리해둔 논문집이다. 나는 솔직히 이 책을 보면서 철학 논문은 이런 식으로 써도 되는 건가 싶었다. 논리성도 없고, 구체적인 인용도 없고, 그저 감정과 직관에 호소한다. 용어는 이런저런 철학용어를 갖다 쓰는데, 내용의 깊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나라도 그런 글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실망스러웠던 것은, 그러면서 지은이 스스로 자신의 글이 대단히 참신하다고 느끼는 듯 했다는 점이다. 이런 글에 낚이는 사람도 많겠지?

요새 대가들의 글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기대에 비해 너무 실망이 큰 책이었다. (서울 해석에 대해 다루지도 않고!) 중간에 약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도 이미 널리 알려진 주장이었지 지은이의 참신한 주장은 아니었다. 철학 하는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이런 글 써내면 뿅 가버리는 걸까? 왠지 모르겠지만 철학 하는 사람들은 과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나보다. 칸트의 영향일까? 소칼 사건이 괜히 벌어진 게 아닌가보다.

@ 이런 논문집은 주장 하나하나 데려다놓고 논박해야 제대로 된 독후감이 될텐데, 시간 관계상 생략.
by 로보스 | 2007/05/07 19:15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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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긁적 at 2007/05/07 19:24
..... 그러니 인문학의 위기가 찾아온거죠.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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