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C. 린드버그 외, <신과 자연>,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임종태 교수님이 권해주신 과학사 책 중 하나. 구리구리-_-하게 생겨서 쳐박아놓고 오랫동안 안 보다 드디어 손에 잡았다. 구리구리한 외모답게 구리구리한 번역이 눈에 띈다. 이 책의 상권은 신학자가, 하권은 철학자가 번역했고, 그 철학자가 유명한 박우석 교수님이시다. 사실 박우석 교수님의 번역 실력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 <죄수의 딜레마>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기대하지 않았지만, 신학교 교수님도 만만치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은 다른 책들에 비해 특히나 번역 상태가 심각하기 때문에 '여기 설마 교수님이 들어오시겠어?' 하는 깡을 가지고 감히 교수님의 번역을 평하려 한다. 분명 내가 존경하는 분이고, 닮고 싶은 부분도 많은 분이지만, 모든 사람이 완벽하지는 않으니까 설마 보신다 해도 이해해주시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보다 가시오로비치 양자 책이 훨씬 이해가 잘 된다. 번역 자체도 난해할 뿐만 아니라 오역도 많다. 예를 들어보면, 다윈 진화론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14장 하나에서만 다음과 같은 오역들이 발견된다.

1) 처음 부분에서 '자연 도태'라는 말이 나온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계속 읽어나갔더니 '자연 도태(natural selection)'라고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왠지 도태와 자연 선택을 섞은 것 같다.
2) 곧이어 '변태'가 나온다. 아 재료과도 아니고 무슨 변태... 변이(mutation) 얘기였겠지요.
3) 484쪽에는 변이에 대한 아사 그레이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전혀 생뚱맞은 단어가 등장한다.

"그는 이러한 변화의 양상을 식물 왕국 전체로까지 확대시킬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아마 kingdom plantae, 혹은 plant kingdom(식물계)을 그냥 번역하신게 아닐까... 생물학 공부 좀 하고 번역하시지.

생물학 공부만 안 하신 게 아니라 기독교 공부도 안 하신 것 같다. 487쪽에 보면 헉슬리가 한 말을 인용한 구절이 나온다.

"불가지론은 사실상 신조가 아니라 방법이며, 그 본질은 단 하나의 원리를 엄밀하게 적용하는 데에 있다. 그 원리는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소크라테스만큼 오랜 것이며; "모든 것을 시도해 보라, 좋은 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한 사람만큼 오랜 것이다; (하략)"

뭐 세미콜론의 남용 등은 일단 넘기고, 이 문맥만 보고 "모든 것을 시도해 보라, 좋은 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한 사람이 누군지 이해할 수 있는가? 이런 번역 아래서는 당연히 알 수가 없지. 정답은 사도 바울이다. 신약성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에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개역)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게 영어 성경 NIV에서 "Test everything. Hold on to the good."으로 번역된다. 이걸 직역하면 방금 인용한 부분처럼 되고.

헉슬리는 자기를 공격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성서'에서조차 불가지론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굳이 출처를 달지 않은 이유는 저 글이 쓰여지던 시대 배경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테고. 하지만 기독교 국가도 아닌 현대 대한민국의 독자들이 저 구절을 그냥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도 저렇게 직역을 해놓은 상태로?

사실 이 책은 번역만 빼면 무척 훌륭한 책이다.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창조론이니 자유주의 신학이니 하는 얘기는 물론이고, 종교 개혁과 과학 혁명의 상관관계라든가, 뉴턴-다윈의 신앙관이라든가, 하여간 흥미진진하다. 저 험난한 번역의 파도를 헤치고 이 책을 끝까지 독파한다면, 아마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지 않을까.

아 한 가지, 이 책은 기본적으로 논문을 모아서 만든 책이다. 그러다보니 독자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가정하고 있고, 대부분의 용어를 설명없이 사용한다. 과학사-교회사-서양사에 대한 교양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렇다고 뭐 전공자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나 같은 공돌이도 80% 정도는 이해했으니까. 또, 서로 다른 저자들이 각각 쓴 논문들을 모은지라 각각의 논조가 다르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랄까. 어느 장에서는 기독교를 옹호하고, 또 다른 장에서는 기독교를 까대고. 재밌단 말이지.
by 로보스 | 2007/04/05 18:57 | |감상|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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