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그라스만, <쿼크로 이루어진 세상>, 생각의 나무.

백만년전에 읽은 책. 독후감을 쓰려고 이 책을 떠올리니까 짜증이 밀려온다.

이 책은 핵·소립자물리학 담당 교수셨던 이강영 교수님께서 강의 첫 시간에 추천도서로 권해주신 책이라 학기 중반에 사보게 되었는데, 제목과는 달리 진짜 소립자물리랑은 거의 관련이 없는 책이다. 일단 그래서 심하게 마이너스를 받고 들어간다. 절대 소립자 책을 기대하지 말 것.

이 책은 스스로 '청소년을 위한 교양 물리학'이라고 주장(13쪽)하는 책인데, 이 부분부터 따져보자. 우선 이 책에 담겨있는 내용을 보자. 역학, 표준모형, 상대론, 장 이론, 전자기, 파동론, 양자역학, 열역학이다. 딱 보면 물리 II 내지는 일반물리 수준의 주제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뭔가 다루는 내용에서 차이가 있는가? 거의 같다. 결국 일반물리를 '조금 더' 이야기체로 고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은 물리학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을 다루고 있지도 않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비판과 독설은, 이 책이 정녕 '교양 물리학책'인가를 의심해보게 만든다. 책 일부를 살펴보자.

루카시안 석좌교수인 스티븐 호킹은, 불쌍한 빅뱅과 관련된 자신의 책을 선전하는 행사장에서 한 가지 멋진 사례를 제공해준다. 그의 베스트셀러 저서 <시간의 역사>를 물리학자가 아닌 사람이 읽을 때, 처음에는 호킹 박사가 개인적으로 블랙홀을 생각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벌써 블랙홀의 존재는 예견되었는데, 호킹 박사는 단순히 양자론을 가지고 불랙홀의 주위를 쑤시고 다녔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는 얻는 것이 별로 없다. (후략) - 341-342쪽, '불쌍한 물리학'

과연 호킹이 필자의 말대로 '단순히' '블랙홀의 주위를 쑤시고 다녔을 뿐'일까? 이후 필자는 지구의 북극 그 바깥쪽에도 별들이 존재한다며, 우주가 닫힌 구체라 해도 그 바깥쪽에 존재들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내가 미분기하학이나 위상수학을 안 들어서 이게 헛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공간을 구체로 '비유'하는 것은 말그대로 그냥 '비유'에 불과하다. 사실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걸 사실처럼 받아들여서 오해하는 건 곤란하다. 그 외에도 뉴턴에 대한 엄청난 적개심을 드러낸다거나, 화학에 대한 자신만의 불쾌함을 표출하는 등 '물리학 교양서'로는 너무 편파적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너무나도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물리를 잘 모르는 철학 전공자라는 것이다. 아마 원서가 독일어로 되어있었고, 독일어를 잘 하는 물리학자가 근처에 없었나보다. 출판사가 급했나? 솔직히 이런 책이라면 양자론과 상대론을 제대로 깊이있게 공부한 사람을 시켜야 할텐데. 앞날개에 있는 역자 소개에 보니 전문번역가라고 한다. 게다가 이 책 외에도 물리학 책을 여럿 번역하신 분! 마지막에 써있는 '옮긴이의 말'에는 어찌나 멋진 말을 써두셨는지, 저는 역자님께서 물리학 박사 쯤 갖고 계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간단한 물리학 용어조차 제대로 번역하지 않은 걸까요?

이 책에 나오는 물리학 용어는 잘못된 게 많다. 첫번째. 운동량(momentum)을 죄다 충격량(impulse)으로 번역해놓았다.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운동량으로 배우는 대상에 대해 계속 충격량이라고 하니까(예를 들어 '충격량 보존의 법칙'!)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그나마 얘는 좀 나은게, 뭔가 필자가 중간에 그렇게 쓰는 이유에 대해 언급해준다. 근데 솔직히 이 부분도 내가 독일어를 모르니 이게 왜 타당한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두번째. 정상파(stationary wave)를 자그마치 '정지파'로 번역해놓았다. 처음 보고 무슨 소린가 했다. 뭐 어디선가 쓰는 말이긴 한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물리에서 쓰는 말은 아니지 않나? 물리학 용어가 뭐 그렇게 당신 쓰고 싶은대로 쓰는 건가요? 이외에도 또 몇 개가 더 있었는데, 책을 읽은지 오래돼서 다 까먹었다. 그리고 용어만 잘못 쓰는 거면 용서가 가능한데, 이런, 번역조차 허접하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 구조와 문단들. 대단하십니다. 편집자들도 대단한 게, 이러한 엄청난 오역들이 있는데도 다 넘겼다는 거. 물리 전공이 아니라서 그랬겠지? 아무리 그래도 '생각의 나무' 씨, 실망입니다.

이 책에서 건질게 아무것도 없다면 너무 암울할 것이다. 난 그나마 자기장이 전기장에 특수상대론을 가한 것이라는 사실 하나와, 열역학 뒷부분에 있는 정보이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건진 것 같다.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조금이나마 건져가야지.

아 그래도 절대 비추다. 최근에 읽은 과학책 중 제일 쓰레기인 듯.
by 로보스 | 2007/03/18 00:57 | |감상| | 트랙백 | 핑백(2)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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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레벨인지는 좀 의문이다. 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에게 이 책을 보여줬을 때 과연 내용을 이해하고 흥미를 가질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책도 &lt;쿼크로 이루어진 세상&gt;과 비슷한 우를 범하는 것 같다. 게다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 내용들은 다 빠졌다. 현대물리가 들어가야 사람들이 좋아할텐데, ... more

Commented by Yuki37 at 2007/03/18 11:07
충격량쪽은 저자 부터가 그렇게 써버린듯. 아마 그렇게 비슷할(?) 수도 있는 두 개념을 하나를 버리고 이걸 쓰겠다. 라고 저자가 써놨으면 그건 역자도 어쩔 수 없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_=;

어쨌든 제목이랑 내용이랑 정말 다른 차원에 있는 책이긴 하지 ㅋㅋ
에구에구 아무래도 내가 독어공부좀 해야겠어 ㅋㅋㅋ
Commented by Luftschloß at 2007/03/18 19:31
독일어로 운동량을 Impuls 라고 해서, 그런것 같습니다.
방금 찾아본 독한사전에서도 Impuls의 뜻 중에서 '충격량'이 '운동량'보다 위에 있는 편입니다.
"번역은 반역"의 사례라고 할 수 잇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Commented at 2007/03/22 01:1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로보스 at 2007/03/22 12:11
비공개님/
아... 그런 부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연락처라도 남겨주셨으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었을텐데 아쉽네요.
Commented at 2007/03/22 23:11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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